기념비적 형태들
미술비평가 안소연
박용화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동물원에 주목해 그림을 그려 왔다. 중간중간 동물원이 아닌 것을 그리기도 했고, 그보다 훨씬 앞서서는 주로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초현실적 함의의 인체와 동물(의 살)이 함께 있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그가 줄곧 회화의 대상으로 삼아온 것은, 동물원의 풍경 그 자체이기 보다는 동물원이 함축하고 있는 이중의식(ambivalence)으로서의 초현실적 장면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그림은,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동물원을 관통하는 언캐니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를테면, “동물-원(動物園)”이라는 말에 깊숙이 배어 있는 억압[園]의 경계와 원초적이며 원시적인 생명력[動物]의 끝없는 병치 내지는 대치 상태처럼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방어와 보호[園]의 장소이기도 하고 박제된 영원한 죽음[動物]을 표상하기도 하며, 그것의 병치도 성립한다. 박용화가 유독 긴 시간 동안 동물원에 집착해 왔던 것은, 그것이 함의하는 초현실적 이중의식의 끝없는 연쇄 작용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2013년 이래 지속적으로 동물원을 그려왔으며, 최근 전시 ⟪미완의 모뉴먼트⟫(2020, 스페이스가창)도 그것의 연속을 보여줬다.
전시 제목과 동명인 <미완의 모뉴먼트>(2020)는 각각 세로 34.8cm와 가로 27.3cm 크기의 캔버스에 그린 회화 연작이다. 박용화는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에 어떤 형상의 유형을 기록한 듯한데, 대략 둘러만 봐도 그것이 동물원의 인공적인 구조물을 배경으로 한 동물의 형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자연물을 대체한 인공 구조물의 조야함을 선명하게 묘사하는 대신 살아 있는 동물들의 모습은 석고로 대충 떠냈거나 돌로 대충 깎아 놓은 조각적 형상처럼 상대적으로 불확실하고 생기 없게 표현했다. 이러한 반전은 초현실적인 역설을 보여주면서, 그가 동물원에 몰두하면서 왜곡된 재현을 통해 현실의 언캐니한 모습을 드러내려 했던 대략의 정황을 가늠케 한다. 특히 <거짓과 진실의 경계>(2020)에서는, 초현실적 수수께끼에 한껏 심취해 있는 듯한 그의 시각적 충동을 좀 더 엿볼 수 있다. 예컨대, <맹수의 우리>(2020)가 부분적으로 다시 한번 환기시키듯, 동물원의 사나운 맹수는 “죽음”에 대한 징후로서 “부재의 흔적”으로 존재하든가 “박제된 형상”으로 정지되어 있다. (초라한 인공 구조물이 시체처럼 펼쳐 있는 우리 안에, 맹수는 늘 부재하거나 아니면 바위나 땅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거짓과 진실의 경계>는 좀 더 흥미로운 초현실적 병치를 다룬다. 세로에 비해 가로의 폭이 유난히 긴 화면은, 동물원의 공간을 스펙터클한 인공 자연으로 지각하는 대신 일그러지고 왜곡된 현실의 이면을 보게 한다. 조야한 실내 벽화에서 포효하고 있는 맹수의 형상은 꽤나 사실적인 재현-실제 호랑이의 재현이 아닌 조야한 벽화의 재현-에 기반하고 있으나, 실제 우리 안의 맹수는 앞선 <미완의 모뉴먼트>와 마찬가지로 대충 만들어 찍어 놓은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 같은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정황은 동물원에 투영된 초현실적 이중의식의 절차에 따라 억압된 사건들을 충분히 다룰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박용화는 거세되고 상실한 원초적 감각을 봉인하고 있는 초현실적 시공간으로서 동물원이 지닌 함의를 중심에 놓고, 숱한 대체물의 이미지들을 같은 화면에 병치시켜 놓음으로써 현실에서 “기념비적 형태들”의 변형된 모습을 비밀스럽게 지속시킨다. 그것은 박제된 동물의 조각적 형상들처럼 가끔 그림에서 “죽음”의 표상으로도 대체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