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나 외면한 것들에 대한 서사
허나영(미술평론가)
Hur, Nayoung(Art Critic)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적이 있는가. 분명 존재하고 있기에 스스로를 있는 힘껏 표시했지만 외면당한 경험, 이는 비단 특정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흔히 길에서 넘어져 난처해하는 사람을 그저 지나치기도 하고, 학교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들을 모른 척 넘어가기도 한다. 분명 어떤 존재가 있었고 그에 따른 감정이 발생했음에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또는 그럴만한 힘이 없다는 이유로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외면당한 그 당사자가 되어, 마음속에 서늘한 바람을 느끼기도 한다.
부정당한 동물원 속 생명
박용화 작가는 이렇듯 존재하지만 외면당하는 존재로 동물원 속 동물을 제시한다. 분명 우리처럼 살아있는 생명임에도, 그 생명의 자율성이 무시되는 존재이다. 실제 동물원의 존폐에 대한 논의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다. 한 공간에서 북극에 사는 곰과 남극에 사는 펭귄, 초원에 사는 기린을 볼 수 있다는 ‘교육적’ 혹은 ‘오락적’ 이유로 만들어진 동물원이지만, 이러한 목적은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의 병색이 짙은 현재,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불어 사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이 시대에 동물원은 지극히 비윤리적인 공간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럼에도 교육적 목적으로 아기 동물들을 가두어 보여주는 미니 동물원이나 동물 카페가 성행하는 상반된 현상도 있으니, 여전히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문제적이다.
박용화가 제시하는 동물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부각한다. 조악하게 페인트로 대충 그려진 산과 하늘이 있는 배경 앞에 있는 독수리처럼, 필요한 행동반경보다 좁은 케이지 안에 갇혀있는 동물들은 ‘그저’ 있을 뿐이다. 독수리에게는 넓고 높은 하늘이 필요하고, 원숭이에게는 정글의 울창한 나무가 편안하며, 북극곰은 눈 위에서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알지만, 동물원 속 동물들에게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제공해주지 않는다. 단지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고자 말이다. 더 나아가 박용화는 리비아의 내전으로 방치된 동물원에서의 굶어 죽은 동물의 사채를 화폭에 담았다. 인간의 생사 앞에서 동물의 삶이 무시되어버린 가장 극명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시는 얼마 전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일어난 일명 ‘뽀롱이 사건’에서도 드러났다. 2018년 가을, 뽀롱이라는 이름의 어린 퓨마가 우리를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전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속보나 방송을 통하여 경고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오전에 퓨마가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오후 즈음 사살 되었다는 뉴스보도가 들려왔다. 퓨마라 하면 빠른 맹수로 알려져 있기에 안심할 일이었으나, 이어 드러난 사실에서는 ‘왜 죽여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던져졌다. 이 어린 퓨마는 동물원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방황하다가 크게 반항도 못하고 사살되었기 때문이다.
맹수가 우리를 탈출하였으니 필요한 조처였다는 입장도 있었지만, 사람을 헤치지 않았는데 사살해버렸기 때문에 과한 대응이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작가 박용화 역시 이 사건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간 동물원의 동물을 소재로 삼아왔고, 특히 대전 소재의 레지던시에서 활동을 하면서 오월드를 수차례 드나들었기에 뽀롱이 사건은 작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에 작가는 <나는 나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을 제작하고 설치하였다. 하지만 작품 속 뽀롱이는 지워져있다. 차마 그리기 힘들었다는 감정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실제, 뽀롱이는 이렇게 그의 삶과 죽음에서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각화 한 것이다.
휴먼 케이지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 가보자. 비단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뽀롱이에게만, 동물원 속 동물들에만 해당될까. 박용화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휴먼케이지(Human Cage)’를 만들었다. 지난해부터 몇 차례의 전시를 통하여 다양한 공간에서 제시한 휴먼 케이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들어가 있는 우리이다. 동물원의 동물 대신에 말이다. 일차적으로 검은 틀 안에 인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인간>에서처럼, 제3의 시선으로 인간을 들여다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먹으며, 어떠한 행동을 하는 지 말이다. 그런데 박용화는 여기에 더 복합적인 시선을 제시한다. 휴먼 케이지 속에 존재가 지워진 뽀롱이를 담은 화폭을 걸어 케이지 속에 또 다른 케이지를 표현한다. 그리고 케이지 안에 들어간 관람객은 관찰대상이 되지만, 케이지를 나오면 그 안의 인간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이렇게 관찰의 주체와 대상이 가진 시선이 교차되고, 이 무수한 교차 속에서 그 어떤 상황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고 통제할 수 없다.
스스로 존재의 의미와 위치를 결정할 수 없음은 결국 내가 서있는 위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내재된다. ‘불안’은 박용화의 작업 속 중심 주제를 이뤄왔다.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작업실이나 레지던시의 상황에 따라 떠돌아다녀야하는 유목민적인 생활, 새로운 환경에서 접하게 되는 낯설음, 더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파주에서 활동하던 시절 늦은 밤 북에서 들어오던 스피커 소리 등. 이 땅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로서 느껴왔던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불안은 항상 그와 함께 함께 했다. 어쩌면 박용화는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반복적으로 자신의 불안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는 심리학적 방식도 있으니 말이다. 실제 그는 눈을 감고 있는 지인들의 초상을 통하여, 그림 속 주인공들이 눈을 감고 스스로의 존재를 들여다보길 원한다. 그저 외부와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느꼈던 불안의 감정과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몸 자체를 내면적으로 알아차리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에 대한 사유는 비단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실제적인 내 ‘안’을 의미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피부 안의 ‘살’이다.
서사를 통한 내 안의 불안을 들여다보기
박용화의 작업에서 동물원의 동물만큼이나, 눈에 띄는 소재는 바로 ‘고기’이다. 요리를 하지 않은 정육된 고기를 그림을 소재로 삼는 것은 서양의 미술사에서 흔한 경우이다.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이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고기를 작품의 오브제로 쉽게 끌어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연상되는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회화 연작일 것이다. 고기를 소재로 삶은 것 뿐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뒤틀리게 표현하고 얇은 선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삼면화를 그리는 등의 모습은 박용화의 작업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작가가 홍성과 산청에서 작업을 할 때 실제 베이컨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이컨의 작품에서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하듯, 촉지성에 근간을 둔 인간 육체에 대한 감각에 초점을 두게 된다면, 박용화는 그보다 인간의 내적인 서사를 드러내고자 한다. 인간 역시 동물이기에 물리적으로 피부 아래에 고기와 같은 살을 갖고 있으며, 이는 동물성을 갖고 있다는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더불어 고기를 불안한 상황과 병치하여 어떠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서사는 물론 구체적이진 않다. 어찌보면 작가에게서 시작된 사적 서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억압된 공간의 본능적 표현 3연작>에서처럼, 세 가지의 맹금류의 우리 속 모습은 그 반복적으로 유사한 요소들을 통하여 어떠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각 우리 속에는 맹금류가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둥치가 있고, 우리 바닥에는 자연인 듯 보이게 노력한 돌과 먹이인 고리덩이가 놓여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 바라보게 되는 벽만이 돌로 되어 있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우리 안에 갇혀 있고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벽 위에 흰 선이 그어진 생존의 자국 뿐 이다. 살아있는 새를 보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나무둥치와 물, 고기를 넣어주었지만 그들은 그저 파란색 천장의 가짜 하늘 아래에 갇혀 분비물로만 스스로를 표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죽은 것일까. 혹은 산 것일까.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슬퍼야할까. 재미있어야할까.
회화라는 틀, 그 경계 밖에서 이야기하다.
그런데, 박용화는 우리 속 동물의 분비물 자국을 ‘표현’이라 칭한 것이다. 이는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예술을 낭비된 것(waste)라 칭한 것과 연결된다. 자본주의의 합리적 소비라는 룰에 맞지 않는 상품이 바로 현대 예술이다. 비합리적이고 재화의 축적의 수학적 원리에 맞지 않는 부수적인 것이며 버려질 법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 속 분비물 자국 역시 인간이 외면한 한 존재가 남긴, 지워야하는 흔적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흔적을 표현하면서 우리는 그 존재가 살아있는 생명임을 인지할 수 있다. 박용화는 그저 어떠한 대상을 재현하고 옮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평면의 회화이지만 동물이 갇힌 우리의 공간을 인지할 수 있기를 바라고(가짜 풍경의 벽이나 가는 선의 윤곽 등), 회화를 다시 전시공간과 케이지라는 설치물에 배치하여 실제적인 공간 속에서 증거가 되게 한다. 외면된 존재에 대한 증거로 말이다.
이러한 증거로서 회화의 역할을 위하여 대전시립미술관의 넥스트 코드 전시에서 박용화는 조금 더 설명이 될 만한 드로잉을 선보인다. 동물원 우리 속 인공적 구조물들이다. 나뭇가지, 철제 봉, 줄 등. 우리 속에서 동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동물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보다는 분명, 동물을 보기 위하여 온 관람객, 즉 인간에게 설명 가능한 장치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인간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동물원은, 인간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추억’을 장소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는 동물들에게는 그저 지워버려도 되는 흔적과 같이 외면 받는 공간이다. 이렇게 우리가 이 생명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다시 말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면 아마도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현실직시가 합리적인 설명이나 돈으로 살 수 없는 예술의 역할일지 모른다. 그래서 작은 드로잉에서 혹은 전시장에서 마주친 케이지에서 관람객이 자신의 내면 속 불안과 존재를 알아차리길 바라는 박용화의 작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