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정 민 / 화이트노이즈 운영 및 독립기획자
박용화의 페인팅은 지켜야 할 구분 장치의 경계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에서 시작된다. 당신은 그 경계의 안에 있을 수도 있고 밖에 있을 수도 있으며 이는 감상자의 선택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풍경과 피사체는 분명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나 친숙한가에 있어서는 의구심을 갖게끔 한다. 때문에 경계의 안과 밖, 어떠한 선택에서도 이미지와 감상자 간의 절대적으로 좁혀지지 않을 물리적 캔버스의 두께만큼 그림 속 대상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앎’의 한계가 존재한다. 그림 속 풍경에 마땅히 있을 법한 울타리, 유리막, 창살 등과 같은 얄팍한 경계에 선 시점은 기이한 공기를 형성하며 여기서 감히 상상하고 그려내는 행위를 당한 피사체와 환경의 기능과 목적, 본질을 의도치 않게 의심하고 판단을 거쳐버린다. 수많은 불가피한 ‘피상적 앎’을 맞닥뜨리는 자연스러운 폭력성과 긴장감을 내포한 사회는 자연과 인간의 유대라는 선한 명목하에 그와 반하는 억압을 전제로 가져가게 되는 (작가의 그림 속 자주 등장하는 배경인) ‘동물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불어 부재되거나 불분명한 실루엣 정도로만 그려진 해당 배경에 익히 있어야 할 대상은 불안함을 입체적인 풍경으로써 보여주며 제3의 위치에 놓인 감상자까지 그 관계 속으로 유인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미지-관객, 피사체-환경, 작가-관객, 모든 관계에 있어 절대 좁혀지지 않을 보이지 않는 경계를 두고 서로 해치지는 못할 것이며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계는 깊고 가까운 관계에 대한 염원과 갈망에 비례하여 견고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