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2023)

박용화 작업론

충남미술관 TF 학예사 김복수

 

박용화의 근 몇 년간의 작업을 살펴보면 유랑자적 냉소가 깊이 분절되어 있다는 것이 첫인상이다. 기실 작가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그림의 도상들과 배치는 그런 방랑자적 특이성이 드러나 있다. 그의 그림이 스펙터클하거나 급진적이진 않지만 어떤 자전적 사건이 늘 중심에 있으며 파편적 알레고리들이 곳곳에 숨겨진 채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그의 그림을 읽어보자는 모든 이의 공통감각일 테다. 물론 도상과 이미지에 대한 정보나 출처가 감각되거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 범주에서 새로운 의미와 의미로 연쇄되어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6년부터 2017년도 대표작으로 <물불 가리지 않는 행위 2016>나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이거나 2017>, <물이 넘치고 불이 담긴 공간 2017> 등 ‘불안을 담은 공간’ 시리즈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실제 불안을 동반한 공간으로 연출되었다. 죽은 화분에 묶여진 개는 으르렁대며 짖어대고, 던져진 고기 덩어리를 위시로 그 공간의 사건을 누구인가 염탐한다. 느닷없이 다가온 실체 없는 사건은 흩어졌으며, 한켠에는 불이 지펴지고, 때론 물이 솟고, 때론 해골이 등장하며 또 다른 해석과 해석을 증식시킨다. 이 느닷없는 이미지의 등장과 분절은 자신의 정처 없는 현실을 멈추게 함과 동시에 공간에 나열되며 초현실적 그림으로 기록된다. 이렇듯 박용화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경험한 불온한 세계의 궤적들을 담아내는 것이 근 몇 년간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늘 삶에서 길어 올린 음영의 기억을 현실계를 인식하는 공간에 시뮬라크르처럼 포착하여 상징적인 언표로 표상했다. 마치 유쾌하지만 않았던 유목적인 자전적 시간을 기록하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그의 도상을 읽고 따라가다 보면 참 기이하고 상징적 공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림 속의 장(field)은 숨은 그림 찾기이며 길 잃은 자아 속 자아 찾기이다. 그의 작업노트에서 말하듯 유목자적인 태도로 작업에 임했다. 한동안 유목적인 생활들은 변변치 못한 공간에서 지냈던 터라 작고 습습하며 폐쇄된 공간에 대한 삶의 연민을 캔버스의 도상에 반추한 것이다.

최근 연작 중 동물원시리즈에서 동물원이라는 인공적 장소의 폐쇄된 풍경도 자신의 시간적 의미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도상으로 등장하는 작업에서 기억의 공간으로서 동물원-되기 메타포적 최근 작업까지 그 불온의 코드는 연결된다.

 

동물원 시리즈들을 더 탐색해보자. 동물원 안의 동물들은 그저 그림의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등장된다. 동물들은 이미 눈은 지워진 채 욕망이 퇴색된 형상으로 반 박제되어있는 생명으로 묘사되어 있고 공간은 죽어있다. 이 죽은 공간에는 인공자연을 구현한 나무 놀이터와 해골과 고깃덩어리가 진열되어 있고 반대로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살아있는 불과 물이 그려져 있다. 불과 물은 공간에 번갈아가며 등장하며 불온한 공간이 아직 살아있음을 암시한다. 물과 불을 죽어가는 공간에 배치하여 두 사이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인데 아직 삶과 생명이 배태되는 되고 있음을 상호 교차하듯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화면에서 불과 물의 작동은 아직 살아있는 암시하는 장치로 수평과 수직에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박용화의 이 불온의 코드의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떤 사건들이 빈틈으로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며, 히스테릭한 징후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둔갑하여 드러나기도 한다. 박용하는 이 평범한 일상을 뒤집듯 자신의 기억이 박힌 모종의 욕망의 분절과 삶의 특이성을 덤덤하게 재현하기에 그의 작업이 기이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해석이다. 동물원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생생한 관람자들의 호기심을 동물들이 관람하는 듯 묘한 상호관계적인 경계가 존재하고 있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 2020> 작품에서 동물원 안쪽의 파라다이스로 꾸며낸 벽화와 박제된 듯 눈 없는 맹수와 대치되는 풍경으로 역설적 경계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이는 동물원의 이중적 경계로서 살아있는 듯 아주 생생한 벽화와 폐허처럼 낡은 풍경을 이질적으로 배치시켜 욕망하려는 대상의 허구를 폭로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관람하는 구경꾼으로서의 욕망을 살아있는 동물과 파라다이스의 이미지를 병치시킴으로서 오히려 파라다이스의 향한 욕망의 허구를 들춰내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또 다른 작업으로 <죽어서도 틀에 박힌 2022> 시리즈로 철망에 박혀 자란 나무를 그려낸 작업이다. 모종의 한계/경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낸 작업으로 삶의 기이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이제까지 미묘하지만 다채로운 경계를 모색한 작업을 선보였지만 이 작업은 결이 동물원시리즈의 다른 경계로 보여 진다.

 

이렇게 그의 동물원 작업들은 동물원-되기를 통해서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불안’의 프레임과 경계를 늘 ‘소통’하려는 넓은 의미로 개시하려는 의도이다. 실제 미술 전시장이 아닌 정육점 벽에 진열하거나 야외에 동물원을 모티브로 한 전시장을 설치해서 작품을 선보이는 <Human Gage> 프로젝트도 진행한바 있다. 이는 그가 작가노트에서도 적시해 놓은 ‘우리 모두가 잠재적 시체다’라는 명구아래 살덩어리를 실험적인 작업으로 개시하며 비미술적 장소에 설치하며 나름의 ‘소통’을 꾀한 것인데 필자가 보기엔 그 ‘발견’ 자체와 ‘제시’가 이미 ‘소통’이라는 행위이다. 조르쥬 바타이유가 지적하듯 우리는 소통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너무 특권화된 근대적 특징인 ‘명석하고 판명한’ 방식의 소통으로 지나치게 환원되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에서 부재했던 명확한 이미지를 빌어 끊어진 관계를 잇거나 해소하려는 시도가 아닌 관계 속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거나 제시하였다는 점이 소통이라는 것이다. 이는 더 박용화식의 소통의 관계를 더 확장하자는 방법론 일수 있겠다.

 

다시, 박용화의 동물원-되기의 모든 작업들을 모아보면 그가 갖은 일종의 불안을 예술적 생성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일이며 다시 소통의 채널로 확장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지점이다. 그의 동물원시리즈의 작업은 소소하지만 어떤 대상의 배후에 감각되는 이미지를 늘 열어 제쳐 또 다른 겹의 차원으로 이행해 주는 기이한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작업이 털털해 뵈지만 섬세한 이유이다.

 

현대미술에서 어떤 세계의 초점을 찾기란 늘 어렵다. 미로 찾기 같은 이미지들의 연쇄들과 파편적인 의미들은 어떤 모종의 시간과 공간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개인의 직관적인 감각들이 산종되어 있어 더욱 그렇다. 작품에서 드러내려한 어떤 세계의 초점이 도상으로 또렷하게 보이는 순간 금세 지루해지고, 또렷해지지 않는 의미의 연쇄적 딜레마가 느껴지는 순간 늘 소리 없는 허우적거리는 연극성으로 귀결된다. 때론 작품을 보는 시각의 미끄러짐이 길어지거나 혹은 그 이미지의 장막이 두터워지면 질수록 생각은 잠시 침잠되기도 한다. 이는 박용화의 작업들도 어느 일정부분은 공유되는 모순의 지점이지만 다시 뒤집어보자면 그의 연쇄적 길 찾기는 실험적 변주로 더 한층 변환될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동물원을 통해 인간의 이데올로기적 욕망과 자신의 삶을 대조하면서 일상의 언어와 용법을 전경화하려는 박용화의 시도가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