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탈출기
황찬연(이응로기념관 학예사)
동물원을 주제로 박용화는 우리 사회의 각 층의 삶을 환유적으로 표현해 왔는데 금번 스페이스 ㅅㅅㅅㅣ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주제인 ‘퍼포먼스’를 자신의 작업과 결합시켜 새로운 형식을 찾고자 고민했다. 신체행위를 통해 이미지-언어가 전달하지 못하는 감각을 끌어내는 예술형식에 대한 현재적 접근으로서의 새로운 시도라는 주제 하에 박용화는 자신의 이주와 그곳에서의 경험을 작업의 주요 내용으로 등장시킨다. 그에게도 익숙한 거주처에서 낯선 공간과 환경으로의 이주移住란 지속적 관계의 단절이자 새로운 관계의 연결 또는 관계망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주자는 낯선 환경에 내던져져 하나씩 환경의 여러 층위들을 탐색하며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을 중심으로 지형도를 그려나가면서 그곳에서의 실재적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지표화한다.
유목적 삶의 방식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 또는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면 분명 그 지역의 역사적, 사회적, 공간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의 주제와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리적인 답사와 연구과정, 견고하고 구체적인 내용과 오브제를 활용해 기존의 퍼포먼스들이 특수한 장소 또는 상황에 종속된 ‘특정적 성격에 따른 미술’과 같은 역할이 아니라, ‘장소 지정적인 미술’로 수용되고 이해되는 새로운 퍼포먼스의 확립을 위한 시도가 되어야 한다.
박용화가 ‘동물원’시리즈로 작품을 연작하게 된 계기와 담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는 그의 작업노트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항상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탐험하던 그에게 어느 순간 관찰대상이 되어버린 기막힌 순간, 이중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을 경험한 그에게 ‘동물원’이라는 관광의 경험공간이 자신의 공간과 오버랩된다. 이 예기치 않은 시선의 마주침과 불편함 혹은 관찰자의 시선에서만 보았던 우스꽝스런 사태가 다시금 자신에게로 회귀되어진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공포가 배면에 깔려있다.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공간은 반지하 작업실 이다.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주위는 모두 담으로 막혀 있고 창문은 모두 쇠창살로 덮어 있다. 며칠 밖에 나가지 않고 작업하는 도중 지나가던 누군가와 쇠창살 사이로 눈이 마주친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동물원의 관람객으로써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 2012년 작업노트 중에서 –
안전한 거주공간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낯선 시선은 무엇인가를 도둑맞은 듯 하거나, 혹은 자신의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민낯과도 같은, 속살을 보인 것 같은 기분 등 타자로부터 무방비 상태에서의 관찰당함이란 적잖은 충격을 불러온다. 기실 우리는 타자와의 소통을 늘 열려진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닫히면서 열리고, 열리면서 닫히는 그 복잡미묘한 시선은 항시 자신을 안전하고 온전한 보호적 상황 속에 놓여져 있을 때만을 전제로 하기에 자신을 완전히 노출하는 열려진 상황에서 모든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에게 역전된 시선, 관찰하는 시선에서 관찰되는 시선을 느꼈을 때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동물원의 경험이었다.
작가가 스페이스 ㅅㅅㅅㅣ 레지던스 교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홍성 레지던스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작업활동을 진행 한 바 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을회관에 머물며 지역주민들의 일상에 참여하였고, 자신이 피상적으로 만 생각했던 농촌지역의 생생한 모습을 보면서 생각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가 마을회관에 머물 때 그는 분명 마을의 일원이 아닌 이방인으로서의 낯선 시선과 관심을 받아야 했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곳 주민들에게는 신기한 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림 그린다는 젊은 사람하나가 마을회관에 있다는 사건은 분명 주민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법한 일이었고, 작가에게는 그 불편한 시선 속에서 자신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재관찰하며 처한 환경속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기 되기 위한 연구> 삼면화는 제가 홍성에서 3달 동안 묵었던 방안 3면의 창문을 보며 제작한 작품입니다. 밝은 낮에 작은 창문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이 가슴 속으로만 울부짓는 모습 다음으로 밤이 되고 이 공간 안에서 살이 비대해 지는 모습 그리고 결국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생기지만 고기 덩어리만 덩그러니 남아버린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동물원 안에서 적응된 삶의 결론을 이야기 하는 작업이고 흘러내리는 물감의 표현은 자신이 있는 공간에 대해 인지하고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사유하며 유동성을 가지고 다시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 2014년 작가노트 중에서 –
<고기 되기 위한 연구>는 삼면화로 제작된 사육되는 인간의 모습인데, 이 사육의 기호적 의미는 사회적인 고립의 상징이자 단절과 탈출의 몸부림, 자기소외와 소멸을 의미한다. 왼쪽부터 단절된 상황을 두려워하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중앙의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주어진 환경여건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오른쪽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구분 없는 개체로서의 상징적인 모습을 가장 근본적인 고깃덩어리로 표현한다. 인물을 진공 상태의 방안에 배치해 인위적으로 박제시키는 방식, 정지된 시간과 공간 등 이러한 요소는 차가운 죽음의 속성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주변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환경과의 관계를 다시 재고하고 그 안에서 주체는 비완결성과 유동성을 드러내고, 자기 확장이 아닌 자기 변화의 변형성을 추구하는 주체로 되돌아온다. 스스로 허물어뜨리려는 노력,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경계와 이념을 살펴보는 것 등. 아마도 외부의 시선으로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며 하나씩 그 견고한 구조를 들춰내보는 방식이 그의 일상적 삶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동물원 가기위한 연작>(2014), ‘<우리 안의 삶>(2014)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작업공간을 이용한 <공간 탈피를 위한 허물>(2014) 등 작품 전반에 걸쳐 주체의 욕망이 사회로부터 또는 자신으로부터의 승화가 좌절된 상황을 우리(We)→우리(Cage)→우리(Zoo)의 도식으로 풀어본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있어 이미 익숙한 상황처럼, 위험하거나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은 아주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상징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일상성이란 단순히 일상적 반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산업사회의 도시적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상성과 현대성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대정신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현대성, 일상성의 특징으로 양식(style)의 부재를 들었다. 양식이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뜻한다. 삶의 목적이나 방향성, 가치관, 신념 등 개인의 행동방식을, 넓게는 생활양식을, 그리고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뜻하기도 한다.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부재와 함께, 물질이 지니고 있는 일상성과 그로부터 비롯된 평범한 대상으로서의 사물의 이미지들에 시대정신과 상징성을 부여하면서 삶의 모습을 반영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시대반영으로서의 상징적 이미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박용화의 동물원이미지를 통한 실재의 반영은 단순한 사물의 모방과 재현 또는 표상이나 사실적인 묘사 이전에, 존재론적인 의미부여를 근간으로 한 표현의 한 방법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현재의 특수한 규칙과 규율, 특정한 목표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부터의 이탈을 위한 사유의 공간, 지표로서 작용하길 바라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목표가 보편적 이성의 이념을 단순히 거부한다거나 깨부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념을 생산ㆍ유포하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복합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장려해내려 하는데 있는 것처럼 작가 박용화 또한 보편적 현상들을 단순히 따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아래에 행해지는 계층들의 일상 속에서 관습처럼 행해지던 일들을 다시 환기하는 일이다. 결국 일상적인 것에 대한 재고찰과 적극적 수용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며, 이는 자율성 안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정신 또한 지니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