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러고 살잖아, 이 끔찍한 세상에서
살면서 인생 선배들에게 이런 말 많이 들었다. “야, 이 사회는 말이야, 정글이야, 정글.”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너 지금처럼 있다 보면 금방 사십 되고 오십 된다.” 아무리 봐도 정글에 가본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이 생긴 그 어떤 선배 말은 크게 믿음이 안 갔다. 하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흐를 거라던 그 다음 말은 맞았다. 순식간에 40살이 되고 50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에 와서 그래도 나에게는 좋은 일이 있다. 그게 뭔가 하면 이젠 더 이상 내게 ‘살면 이렇다 저렇다, 앞으로 이래라 저래라’ 식으로 잔소리 하는 사람들이 줄었다는 점이다.
화가 박용화는 아직 이런 충고를 들을 나이인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그런 억하심정에 관해 불평 따위나 늘어놓지만, 그는 그때마다 작품을 하나씩 완성해 왔다. 사회에 불만이 있는 한 예술가의 초상이다. 사회와 예술에 관해서 잠깐 이야기해보자. 그 어떤 작가도 우리 삶과 공동체에 관한 조망권을 가지지 못한다. 예술가가 그렇다는 말이며, 성직자나 과학자라고 다를 법 없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만의 촉을 세워서 사회를 바라본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현상학적 인식론 혹은 급진적 구성주의(radical constructivism)의 인지 과학은 총체성을 부정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하나로 꿰뚫어 보려는 관점은 지지한다. 박용화는 우리가 가진 폭력성을 통하여 사회를 통찰한다.
그의 작품에 곧잘 등장하는 형상은 험상궂고 탐욕스러운 동물과 인간의 군상이다. 거기에는 포식자가 있고, 피식자가 있다. 당황스러워 하는 한 사내도 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 가상계의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인 작가 본인이 아닐까. 가장 섬뜩한 장면은 정육점과 같은 곳에 매달려있는 고기다. 단지 소나 돼지이겠지만, 자꾸 사람의 훼손된 주검이 떠오른다. 식인 풍습, 즉 카니발리즘(cannibalism)은 먹고 먹히며 경쟁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충분하다. 화가의 시선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지만, 작품을 보는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는 장소의 낯섦으로 이끈다. 사람이 짐승 가죽을 쓰고 덤비고, 온순하던 동물이 으르렁거린다. 이곳에 던져진 작가에게도 탈출구는 있다. 창이나 문이 있지만, 그 너머라고 사정이 나을 리는 없다. 이와 같은 공간 묘사를 통해 작가는 동물원 철장 속에 갇힌 여느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를 제시한다.
언어유희에 가까울 테지만, 철학자 베이컨이 <동굴의 우상>에 관해 말했다면, 작가 박용화는 <동물원의 우상>에 관해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가 아는 지식만이 곧 진리인줄 착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베이컨이 동굴의 우상이란 말에 빗대어 비판한 것처럼, 작가는 동물원에 갇힌 의인화된 짐승들의 폭력성이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방식이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동물원이 어떤 곳인가? 이곳은 자연을 가장한 문명이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 외딴 곳, 예컨대 작가가 현지 머물고 있는 레지던시 스튜디오의 주변에 펼쳐진 산과 들과 강을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나? 그곳들은 모두 사람의 손이 닿아 길들여진 인공물이다. 작가는 도리어 지식(진)과 도덕(선)과 취향(미)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예술계 안에서 자연의 비정함 내지 폭력성을 감지한다. 학교, 군대, 작업실, 미술관. 그리고 사육장, 도살장, 정육점, 표본실 사이에 선을 잇는 양자 대칭은 시선의 권력에 관한 사회학의 지루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예로부터 예술은 우리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잔혹성을 괴물의 전형성으로 형상화해 왔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여러 유명한 창작물들, 예컨대 <사투르노>에서 토요일의 거인 신(Saturno)이 권력을 낚아 채어갈지도 모르는 자신의 다섯 아들을 차례로 뜯어 삼키는 고야(Goya)의 회화라던가,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같은 고딕 호러 소설, 아니면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Pier Palol Pasolini)의 <살로 소돔의 120일>, 스르쟌 스파소예비치(Srdjan Spasojevic)의 <세르비안 필름>과 같은 영화가 그렇다. 물론 이것은 유쾌한 재현이 아니다. 이러한 판타지가 묘사하는 방식이 잔인해서라기보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데에 투박함이 앞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용화의 미술에도 이와 같은 투박함이 의도적으로 깔려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뭔가 결여된 것이기도 하다. 그의 미술이 다른 잔혹 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작가가 발언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드러내지 않은 채 단순한 상황들만 열거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해석에 있어서 의미를 겹쳐 드러내는 효과가 있기는 하다. 따라서 관객인 우리는 작가가 이끄는 이야기의 음험한 불안에 선뜻 동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림으로 내용을 채운 형식의 구조를 선보일 계획을 짰다. 이 프로젝트에서 평론을 쓰는 현재 시점으로는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미완성 단계의 형태만 볼 수 있었던 그것은 이를테면 오벨리스크(obelisk)처럼 높게 솟은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전시 공간 실내에 설치된다는 점에서 첨탑보다는 하나의 또 다른 방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작가는 그 둘레 안에 소품들을 무수하게 걸어둘 것이다. 노아의 방주가 레퍼런스로 쓰이기에 그것이 가진 다의적인 측면 때문에 직설적인 그의 미술이 목소리를 가라앉힐 수도 있다. 그건 멋진 일이다. 은총을 잠시 거둔 구약의 시대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 사이에 공통점은 분명하다. 과연 작가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나? 도상 곳곳에 배치된 풍자와 혐오, 살아있는 자들에 관한 연민, 그리고 알 듯 모를 듯한 슬픔. 작가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상황으로 제시한다. 그것도 아주 관습적인 회화 구도를 능청스럽게 떼어내어 기묘한 내러티브를 꾸며내서 말이다. 우리가 이 기묘한 이야기로부터 시선을 거두려고 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가 세상을 직시할 용기가 없는 까닭이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예술사회학)